3.기이한일 미스테리

고대 일본의 10대 미스테리

Mr.Lee Mystery 2020. 5. 8.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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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심속 '코푼' 무덤

 

1. 코푼 무덤

 

일본에 흩어져 있는 수백 개의 무덤은 '코푼'으로 알려져 있으며,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덤들은 거대한 열쇠 모양으로 조각된 흙더미들이다. 가장 잘 알려진 코푼은 오사카에 있는 사카이 시의 다이젠 코푼으로 높이는 35미터, 면적은 약 140평방 킬로미터에 이른다. 이 무덤은 16세기 닌토쿠 천황의 무덤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발굴은 금지되어 있다.

 

 

모든 코푼이 일본 왕실의 재산이기 때문에 금지된 영토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코푼은 미스터리한 미지의 실체다. 아무도 그 안에 무엇이 보관되어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코푼을 둘러싼 수수께끼는 심지어 오늘날에도 일본 사람들에게 신비로운 세력과 결부시키도록 장려했고,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편입되었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코푼의 모양과 NASA의 화성 큐리오시티 탐사선이 위치한 이 기하학적 구조를 비교했다. 그렇다면 코푼 신비에 외계인 원소까지 존재할 수 있을까?

 

요나구니 구조물

 

2. 요나구니 구조물

 

1986년 일본 해안에서 발견된 요나구니 구조물은 신비에 싸인 고대 수중 구조물이다. 이 비석은 피라미드 모양의 암석으로 만 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구조물들이 인간이 만든 것인지 자연적인 것인지는 아무도 확실히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는 수십 년간의 논쟁 거리가 되어 왔다.

 

기무라 마사아키 교수

 

예를 들어 류키우스 대학의 기무라 마사아키 교수는 이 지역이 수천 년 전 해수면 위에 있었을 때 인간이 이 구조물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구조물이 고대 일본 사찰이나 무덤으로 의도된 인간만이 설계할 수 있었다는 증거로 이 구조물의 층계와 기둥 모양의 요소들을 지적하고 있다.

 

로버트 쇼치 박사

 

이 논쟁의 반대편에서 보스턴 대학의 로버트 쇼치 박사는 계단과 기둥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 침식에 의해 야기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인간이 만년 전에 이 복잡한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사회가 얼마나 빨리 발전했는가에 대한 현대 사회의 인식을 크게 변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도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3.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부족

 

기원전 732년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인들에게 포위당했고 그 결과 10개의 히브리 부족이 전 메소포타미아의 영토로 유배되었다. 그다음에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바로 그 직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당혹스러운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이스라엘 부족이 사라진 같은 세기 동안 일본은 조몬 시대에서 야요이 시대로 이행됐다. 대륙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유입은 불과 100년 만에 인구가 10배 이상 증가시켰다.

 

 

이러한 전환은 또한 그 나라의 문화와 기술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역사가 조셉 아이델베르크는 이전에 이스라엘에서 사용되었던 것과 같은 유사한 새로운 청동기와 철제 무기의 사용을 단순한 우연 이상의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야요이 이민자들이 다름 아닌 신비롭게 추방된 이스라엘 부족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회의론자들은 아이델베르크의 이론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4. 히미코 여왕의 왕국은 어디에 있었는가?

 

3세기 일본에는 히미코라는 무당 여왕이 강력한 왕국을 세웠다. 당시 대부분의 왕국보다 규모가 컸던 법, 세제, 무역 등의 효율적인 시스템을 갖춘 7만여 가구를 아우른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수백 개의 동상들이 일본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고, 그녀는 일본 역사상 가장 존경받고 무시무시한 지도자들 중 한명으로 학교에서 가르친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는 문서들이 풍부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삶에 대한 어떤 물리적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왼쪽 : 아마무라 게이지, 중간 & 오른쪽 : 발굴현장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아무도 그녀의 무덤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미스터리는 수 세대에 걸쳐 역사학자들을 사로잡았으며, 고고학자 아마무라 게이지에 의해 '일본 고대사에 가장 위대한 논쟁'으로 일컬어졌다.

 

2009년 고고학자들이 일본 중부의 나라(Nara) 근처 사쿠라이 시에 위치한 히미코의 마지막 안식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무덤을 발견했다. 고고학자들은 히미코가 죽었을 때인 서기 240년에서 260년 사이에 무덤 주변부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추정한다.

 

현재의 일본 왕조

 

불행히도 그 무덤은 왕실 재산으로 분류되어 있어서 더 이상의 발굴은 명백히 금지되어 있어서 우리는 결코 진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발견 유물들

 

5. 부서진 진흙 인형

 

일본은 고고학적으로 매우 인기 있는 유적지인데, 일본은 지구상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도자기를 가진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일본 도자기의 파편들은 14,000년 전 조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조각들 중에는 홋카이도, 도호쿠, 간토, 추부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1,000여 점의 토우 조각들이 있었다. 이러한 인형들은 대부분 임산부를 나타내지만 때때로 고양이 얼굴이나 꼬리 같은 이상한 동물 모양들이 있다. 도구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문서들은 없다.

 

역사학자들은 제사에 쓰이거나 신들을 달래기 위한 것으로 쓰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이것들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인형들을 둘러싼 미스터리에 더하여 많은 인형들이 박살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수천 년에 걸쳐 생분해되지 않고 의도적으로 망가졌다.

 

그런데 만약 이것들이 신성한 유물이거나 행운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파괴되었을까?

 

니소닌사에 있는 양귀비 동상

 

6. 양귀비

 

고대 중국 민화에는 네 명의 전설적이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미녀들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이야기 한다. 네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양귀비였는데 양귀비는 8세기 당나라 선종의 총애받는 왕비였다. 755년 양씨의 사촌 구중이 크게 관여한 봉기인 당나라에 대항한 안루산 반란이 일어났다. 연좌를 통해 유죄 판결을 받은 양씨는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중국 산시에 묻혔다.

 

중국 민화의 양귀비

 

일본 야마구치시 니소닌사에는 중국 미녀의 진짜 안식처로 추정되는 신비로운 무덤이 있는데, 그곳에 서 있던 동상은 그녀와 현저하게 닮아 있었다. 일본 현대문학도 이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궁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위대한 중국 미인'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양귀비는 처형을 면하고 일본에 숨어 있었을까?

 

무라마사의 칼

 

7. 저주받은 무라마사의 칼날

 

일본 검술의 가장 악명 높은 인물 중 하나는 14세기 검술가인 센고 무라마사였다. 무라마사는 정신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가 만든 칼날은 비범한 품질로 널리 인정을 받았다. 사실 그 칼의 품질은 다른 검에 비해 너무나 우수하여 무라마사가 마법의 힘으로 그들을 저주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은 검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능력, 초인적인 힘, 고통에 대한 저항력을 더 많이 갖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무라마사의 칼

 

검 자체에 피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는 의견도 있었다. 적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만족하지 못하면 그들은 주인에게 등을 돌리곤 했다. 일본 기록에는 소유하고 있던 무라마사 칼에 의해 살해된 최소 10명의 남성 자살이 기록되어 있다. 무라마사 칼날을 이용한 냉혈 살인 사건도 여러 건 있는데, 이전에 법을 잘 지켰던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도 있다.

 

예를 들어, 마쓰다이라 게키가 도서관에서 세 사람을 도발 없이 죽였던 사건이 그것이다. 비록 저주에 대한 생각은 터무니없이 들리지만, 아직 역사가들은 설득력 있는 대체적인 설명을 할 수 없었다.

 

규수 왕조가 통치했다고 추정되는 지역

 

8. 규슈 왕조

 

일본 군주제의 결정적인 특징 중 하나는 일본 황실인 야마토 왕조 외에 다른 어떤 왕국이나 왕조도 일본을 통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속 세습 군주국이다.

 

일본인이 만든 고대 일본의 기록과 중국 역사학자들이 쓴 기록 사이에는 많은 모순이 있다. 물론, 이것이 오해와 혼란에서부터 정치적 이익을 위한 의도적인 재해석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대에 많은 의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큰 모순이 있다. 바로 중국의 기록들은 다른 왕조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후루타 다케히코는 최근 야마토 왕조와는 확연히 다른 왕조에 대한 중국적 묘사를 부각하고 있다. 후루타가 주목한 주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규슈 왕조가 혼슈에 황궁을 둔 야마토 왕조와는 전혀 다른 섬인 규슈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다. 후루타에 따르면 서기 648년 이전의 일본 군주제에 대한 모든 설명은 이 규슈 왕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일본의 기록적인 군주제에 의문이 던져질 것이다.

 

쓰루기 산과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궤

 

9.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궤

 

유명한 잃어버린 언약궤가 일본에 숨겨질 수 있다는 흥미로운 주장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코쿠 섬의 쓰루기 산에 묻혔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1930년 문학가 타카네 마사노리가 성경책의 출애굽 기록과 8세기 일본 기록인 코지키 사이에 강한 유사성을 발견하면서 생겨났다.

 

코지키는 쓰루기 산에 묻힌 언약궤와 비슷한 신성한 유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책이 같은 유물을 언급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타카네는 그 산에 대한 발굴에 착수했다. 그는 신비한 석물, 터널, 벽돌 아치 등을 발견했는데, 이는 고대인들이 그곳에 무언가를 숨기려 했을 것이라는 그의 가설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성경속의 언약궤

 

산을 발굴하는 것은 그 후 몇십 년 동안 카타네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1952년에 한 발굴이 분해된 인간 미라뿐만 아니라 대리석 복도처럼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1963년 이후 그 산은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모든 발굴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카타네의 이론이 확인되었고 언약궤가 실제로 일본으로 건너갔는지 여부를 판단하려는 모든 노력이 중단되었다.

 

도호쿠 지방의 신고 마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라 주장하는 곳

 

10. 예수 그리스도는 일본에 묻혔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결국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대신 일본으로 탈출했다는 일본 설이 있다. 이 이론은 일본의 도호쿠 지방의 신고 마을에 의해 주창된다. 이 마을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무덤'과 그의 마지막 살아있는 후손인 사와구치 가문의 고향이라고 홍보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그의 자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형제 '이수키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일본인 형제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일본을 여행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몇몇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 속에서 '사라진 세월' 동안 여행했다고 믿었다.

 

이 시기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12세에서 30세 사이의 해였으며, 이 시기 동안 성경 속에는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 기록된 적이 없다. 일본으로 오자마자 예수 그리스도는 벼농사를 하여 미유코라는 일본 여성과 결혼하고 세 딸을 낳았으며 10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은 1933년 고대 히브리 문서들이 발견된 이후 처음 확인되었는데,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년을 일본에서 상세히 기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이 문서들은 일본 당국에 의해 압수되었고,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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