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음모론 미스테리

400만 인도인을 죽인 윈스턴 처칠 음모론 미스테리

Mr.Lee Mystery 2020. 5. 3. 08:00
반응형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는 인도 벵골 지방은 파괴적인 대기근에 부딪혔다. 기아와 이로 인한 질병이 합쳐져 벵골 인구의 거의 10분의 1인 4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인도와 영국 정부는 위기에 대처하지 못한 지방정부를 탓했다.

 

최근 윈스턴 처칠의 개인적인 서신들은 이 모든 죽음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해주게 되었다.

 

 

기근은 참혹했다. 인도 사람들은 나뭇잎과 풀을 먹는 신세로 전락했다. 산 사람들은 약해서 죽은 사람들을 화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거리나 마을에 쌓여 있었다. 부모들은 느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면하기 위해 아이들을 강과 우물에 던지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살했다. 생존자들은 운이 좋아서 인도의 캘커타에서 일자리를 찾거나, 매춘을 해서 식량을 벌었다. 벵골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곡물, 특히 밀과 쌀에 의존했다.

 

 

1942년 후반에 태풍이 이 지역을 강타하여 엄청난 양의 곡식을 파괴하고 더 많은 농작물을 망쳐버리는 곰팡이가 발생하였다. 그 결과 1943년 벵골의 식량 재고는 정상치보다 훨씬 낮았다. 만일 다른 곳에서 식량을 제때 공급받았다면 이 4백만 명의 사람들은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왼쪽 : 언론인 마드후스리 무커지, 오른쪽 :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2011년 언론인 마드후스리 무커지는 방대한 제국의 책임자인 영국 총리가 그들을 돕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자 수가 그렇게 끔찍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문서를 발견했다. 무커지는 기근이 나타나기도 전에 윈스턴 처칠의 인도 정책이 직접적으로 기근에 기여했다고 지적한다.

 

 

1942년 일본은 벵골의 이웃인 버마를 장악했다. 일제의 침략 위협을 막기 위해 영국은 벵골 지역에 중요한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들은 약 18만 명의 농부들을 내쫓고 17만 5천 에이커의 농지를 점령했다. 그들은 또한 벵골의 식량 공급의 상당 부분이 벵골만 지역의 무역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모든 배를 압류하고 운송을 금지했다.

 

게다가 처칠은 그 지역에서 불타는 땅으로 더 잘 알려진 '거부정책'을 제정했다. 일제가 쳐들어올 경우를 대비하여 벼농사와 곡물창고는 고의적으로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인도는 기근이 걷히던 1943년 상반기에 영국군의 전쟁 지원에 쓰일 쌀 7만 톤을 여전히 수출했다. 이 정도면 1년 동안 40만 명의 인도인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이었다.

 

반면 영국은 식량과 원자재 비축량을 1,850만 톤으로 늘렸다. 영국의 인구는 벵골의 인구보다 1,400만 명이 적었다.

 

왼쪽 : 아치볼드 파벨, 오른쪽 : 레오폴드 아메리 인도 국무장관

 

아치볼드 파벨 경과 레오폴드 아메리 인도 국무장관은 인도의 기근 해소를 위해 식량을 인도로 운송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처칠은 퉁명스럽게 거절했다. 그는 또한 캐나다와 미국의 도움 제의를 거절했다. 호주의 보급선은 인도를 지나 유럽으로 바로 항해했다. 처칠은 굶주린 대중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그들이 벵골로 우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근에 대한 뉴스와 사진들이 영국에서 검열되었기 때문에 영국 대중들은 인도의 대기근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기근을 묘사한 스케치북은 영국인에 의해 금지되었다. 처칠의 추리는 "아무리 영양 부족인 인도 벵골의 기아는 건장한 그리스인들보다 덜 심각하다."로 간단했다.

 

처칠의 인도를 향한 인종차별적 무시는 잘 기록되어 있다. 그는 간디를 경멸했고 힌두교도들을 "짐승 같은 종교를 가진 짐승 같은 민족"이라고 불명예스럽게 불렀다.

 

 

1943년 벵골의 위기에 대해서는 "기근이 있든 없든 인도인들은 토끼처럼 번식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인할 수 없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지배하고 있는 인도는 기근 위기에 낯설지 않았다.

 

인도의 대기근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우선 정부는 벵골에 충분한 식량이 있는지 확인하고, 그다음에 기근에 걸린 사람들에게 식량을 주어야 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기근 조사 위원회는 벵골 정부가 1942년 수확된 식량 생산량을 의도적으로 과대평가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그리고 체계적인 관료주의 미숙함으로부터 그들은 사람들이 굶기엔 너무 많은 음식이 있다고 계산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위기에 대비해서 충분한 여분의 음식을 저장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인도 지방의 위임된 민주주의로 인해 더욱 복잡해졌고, 이로 인해 각 지방에서는 서로 식량을 수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도 총독인 비케로이 린리트고우는 식량 부족은 순전히 탐욕스러운 벵골인 상인들이 곡식을 사재기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지방정부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1943년 중반 기근이 닥쳤을 때, 정부의 부처는 벵골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도, 먹일 의지도 없었다.

 

바이서로이 린리트고우

 

그러나 1943년 08월 스테이츠맨 신문은 기근 피해자들의 사진을 게재하기 위해 검열 규정을 어겼다. 그 이미지들은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고 이에 따른 행동도 취해졌다. 바이서로이 린리트고우는 10월에 아치볼드 파벨 경으로 교체되었다. 그와 레오폴드 아메리는 인도가 100만 톤의 곡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 윈스턴 처칠 총리

 

1944년 첫 9개월 동안 처칠은 35만 톤의 밀을 인도로 운송하도록 주선했다. 그는 또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5만 톤을 더 달라고 요청했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은 배를 인도로 우회시킬 수 없었다. 다행히도 벵골에게는 1943년 12월의 수확은 해외에서 들여온 뒤늦은 물자와 함께 기근을 끝내기에 충분했다.

 

처칠의 가족과 옹호자들은 그가 기근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가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며, 당연히 인도 기근보다 유럽의 전쟁터를 우선시했다. 그들은 인도 정부가 이미 정해진 절차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를 계획하고 완화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문서들은 처칠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인도에 대해 냉담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의 친구들은 그의 인종차별에 대해 썼다.

 

마드후스리 무커지는 인도가 역사의 현시점에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에 이르는 길목에 잘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처칠은 대영제국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돕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인도는 1947년에 독립을 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250만 명 이상의 인도 군인들이 연합군을 위해 싸웠다. 역사학자들은 인도의 자원이 거대한 전쟁을 견뎌내는 영국에게 필수적이었다고 동의한다. 문제는 1943년 기근 때 거의 4백만 명의 목숨을 잃은 것이 승리를 위한 필요한 대가였느냐는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