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기이한일 미스테리

불가사의한 잃어버린 문명의 미스테리 TOP 10

Mr.Lee Mystery 2020. 4. 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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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에게 일상적 현실이었던 것이 이제 우리에게는 분명하지 않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과거의 안개가 되었다. 탐험가들은 정글의 한 모퉁이를 돌거나, 이상한 바위 밑을 엿보았고, 이전에 알려지지 않던 인간의 역사 한 장을 발견했다. 심지어 가장 강력한 문명들도 사라지고, 역사가들은 여전히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이에 10개의 불가사의한 잃어버린 문명 10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더스 계곡의 문명

 

1. 인더스 계곡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수천 년 전에, 현대의 파키스탄과 북부 인도의 인더스 계곡의 사람들은 잘 계획된 거리와 놀랄만큼 잘 지어진 건물들로 수많은 도시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번창하여 근동의 수메리아와 거래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 말고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이들의 지도자와 역사 그리고 종교의 그림이나 조각은 없다. 이들이 쓴 글의 상당수는 전해져오지만, 이 중 어느 것도 해독된 적이 없다. 어느 틈엔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라는 대도시는 버려 저버렸다.

 

어떤 역사가들은 가뭄으로 인해 사람들이 이주하였다고 생각하고, 다른 역사 학자들은 그들이 큰 홍수를 겪었다고 생각한다. 일부 음모론자들은 그들이 외계인에 의해 촉발된 고대 외계인에 의해 전멸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단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뿐이다.

 

크레테 문명과 미아노족의 건물들

 

2. 미노안 족

 

거의 2천 년 동안 크레타 문명은 중동으로 뻗은 제국의 중심에서 번성했다. 그 통치자 중 한 명인 미노스 왕은 전설에 입문하여 그의 이름을 문명인 미노아족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궁전과 도시, 특히 크노소스로 유명했는데, 미노안 족의 미로는 테에우스가 미노타우르족과 싸운 이야기로 유명하다.

 

왼쪽 : 벤트리스, 오른쪽 : 채드윅

 

이들은 정교한 예술을 가지고 있었고, 두 개 혹은 세 개의 글쓰기 방법을 개발했는데, 이 중 하나는 1952년에 채드윅과 벤트리스라는 암호 해독가들에 의해 해독되었다. 다른 것들은 완전히 수수께끼로 남았다. 미노아 문명은 결국 쇠퇴하여 그리스에서 온 미케네 인들에게 정복되고 흡수되었다.

 

 

3. 마야인

 

마야 제국은 서기 6세기에 과테말라의 저지대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마야인들은 뛰어난 수학자들이었는데, 이들의 기술을 이용하여 믿을 수 없는 석조 도시를 건설하고 도시 인구를 지원하기 위한 정교한 농업 기술을 개발했다.

 

이들은 자기들만의 상형문자 글쓰기 방법을 가지고 있었고, 놀랄 만큼 정확한 달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달력에서 그들은 제로(0)라는 개념을 발명했다.

 

이들은 또한 다른 도시 국가들로부터 붙잡은 노예와 죄수들을 사용하여 인간을 제물로 받쳐 희생시켰다. 또한,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900년부터 거의 모든 도시가 버려졌다.

 

고원지대에서는 몇몇이 계속 번창했지만, 대다수의 마야인들은 고대의 석조를 개간함에 따라 우림 속으로 마을을 열대우림 속으로 후퇴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했을 때 마야 문명의 시대는 얼마 남지 않았었다.

 

모아이 석상과 라파누이족

 

4. 라파누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스터 섬은 상징적인 900개의 거대한 모아이 석상으로 정의된다. 일 년에 대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팀 단위의 사람들이 각각 손으로 석상 하나를 조각하는데 필요했다. 가장 높은 것은 10미터가 넘고, 가장 무거운 것은 86톤이다.

 

이들은 아마도 라파누이족의 조상을 대표할 것이다. 하지만 라파누이는 여전히 이스터 섬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의 사회는 수세기 전에 붕괴되었다. 동부 폴리네시아 인들은 140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섬에 정착했고, 그들만의 언어, 문화, 왕국을 발전시켰다.

 

문명이 절정에 달했을 때, 섬에는 1만 5천 명이 있었는데, 농사와 어업을 하고 모아이 석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한 세기 후에 유럽 탐험가들이 도착했을 때, 생존한 라파누이 사람들은 2,000명 밖에 없었다. 무언가가 그들을 거의 전멸시켰다.

 

이후, 유럽발 질병과 노예의 습격은 인구수를 단지 111명으로 줄이게 되었다. 1888년 칠레가 이 섬을 합병할 무렵에는 모든 모아이 문명은 무너졌는데, 이는 라파누이의 붕괴에 대한 적절한 비유였다.

 

오늘날 살아남은 후손들은 여전히 그들의 권리를 위해 칠레 정부와 싸우고 있다. 과연 이들은 위대한 모아이 석상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스위스 탐험가 요한 루드비히 버크하르트와 나바테아 인들의 석조 구조물

 

5. 나바테아

 

1812년, 스위스 탐험가 요한 루드비히 버크하르트는 페트라시를 세계에 소개했고, 이 도시는 건조한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협곡의 암벽으로 휘감겨 있었다. 이것을 건설한 사람들은 나바테아인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든 역경을 무릅쓰고 북 아라비아의 비인도적인 사막을 가로지르는 제국을 이루었다.

 

이들은 독창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정확한 석공 기술뿐만 아니라, 이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오아시스들을 잘 이용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오아시스를 이용하여 동서 간의 무역 고리를 형성했다,

 

로마의 작가들은 나바테아 인들이 무역 상품의 원산지와 교역로를 알 수 없는 공상적인 이야기로 위장하여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고 말한다. 이들의 비밀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현대 사람들은 그들이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이들의 문명은 서서히 쇠퇴하였고, 로마인들에게 정복되어 기독교로 개종되고, 후에 이들의 땅을 분할한 아랍인들에게 다시 정복되었다.

 

지금은 우리가 이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관광지와 몇 가지 이야기에서 나온다.

 

크메르 제국

 

6. 크메르 제국

 

크메르 제국은 서기 802년에 자야바르만 2세가 자신이 세계의 왕이라고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 캄보디아로부터 크메르 제국이 동남아시아의 거의 모든 본토를 지배했다는 것을 본다면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수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앙코르로 세계 인구의 0.1퍼센트인 100만 명이 살고 있었다. 그 건물들이 힌두교-불교 제국의 엄청난 부, 기술, 예술 문화를 증명한다.

 

하지만, 15세기에 이르러 제국은 쇠퇴하고 있었다. 테레바다 불교로 개종한 후, 왕들은 더 이상 신성한 존재로 보이지 않게 되었고, 이들의 권위는 시들해졌다. 기술적으로 진보된 관개 및 운하 시스템은 황폐화되었고, 무질서하게 뻗어 있는 도심은 가뭄에 취약해졌다.

 

전쟁과 전염병은 제국의 심장부를 황폐화시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학자, 고고학자, 과학자들은 이런 것들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크메르 제국의 종말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모체 문명

 

7. 모체

 

모체 문명은 페루 북부에서 약 600년 동안 번성했다. 이들은 훌륭한 예술과 진흙 벽돌 사원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산으로 착각할 정도로 거대하다. 하지만, 모체 문명의 모치카 족은 글씨가 없어서 우리는 그들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단서는 미술품과 매장물로부터 얻을 수 있다. 이들은 날씨를 통제하기 위해, 특히 비를 내리기 위해서 제사를 지냈음을 시사한다. 패배자들은 가짜 싸움으로 인간을 희생제물로 목을 베고 진흙에 묻혔을 것이다. 모체 문명은 서기 650년 경에 갑자기 사라졌다. 모체 문명의 도시가 모래 속에 묻혀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기후학자들은 안데스 산맥의 얼음을 분석한 결과 6세기에 페루에서 슈퍼 엘니뇨가 발생해 30년 동안 홍수가 발생한 데 이어 30년 동안 가뭄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은 이것이 모체문명의 모치카인들를 죽였다고 주장한다.

 

이후, 고고학자들은 650년 이후에 지어진 몇몇 마을을 발견했다. 이 정착지들은 이전의 도시들과 달리 모두 요새 형태이다. 그러나 이때 어떤 침략자의 증거도 없었다. 60년 동안 자연재해로 모체 인들은 내전으로 내몰렸고, 이들은 점차 서로를 전멸시킨 것으로 보인다.

 

 

8. 미케네

 

기원전 1600년부터 1100년까지 고대 그리스 미케네 시에 의해 지배되었다. 한때, 신화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이 성채는 1700년경 프란체스코 그리마니에 의해 확인되었다. 청동기 시대에 엄청난 숫자인 3만 명이 주둔하고 있는 군사 거점이었다.

 

이들의 종교와 정치 체제는 아마도 제우스나 포세이돈과 같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많은 핵심 신들을 소개하면서 그리스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시인 호머는 19세기 후반에 발견되기 전까지 신화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또 다른 요새인 트로이를 정복한 그들의 공적에 대해 작곡했다. 이상하게도 기원전 1200년경에 미케네의 도시들은 거의 동시에 불타버렸고 제국은 무너졌다.

 

제국의 붕괴에 대한 설명으로는 침공, 해상 습격자의 공격, 사회 혁명, 지진 또는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악숨 왕국

 

9. 악숨 왕국

 

기원후 3세기까지 악숨 왕국은 로마, 페르시아, 중국에 버금가는 4대 강국으로 여겨졌다. 현대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에 위치한 악숨의 스카이라인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거대한 돌기둥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유대인, 이슬람교도, 기독교인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로 여겨지는 다문화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무역의 중심지였다.

 

구약성서의 시바 여왕은 악숨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며, 기독교인들이 수천 명 씩 모인다는 '시온의 우리 성모 교회' 안에 시바 여왕의 아들의 언약궤가 있다는 소문이 나 있다. 무엇이 제국을 멸망시켰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느 순간 수도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전해지지만,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두 가지 다른 이야기들은 제국이 북쪽의 유대인 여왕이나 남쪽의 이교도 여왕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말한다. 악수마이트 문화는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악숨 왕국의 문명은 더 이상 없었다.

 

 

10. 픽츠 문명

 

픽츠 문명의 사람들은 기독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틴어로 읽고 쓸 줄 아는 유일한 '글씨'는 돌에 새겨진 한 줌의 이해하기 어려운 글자들만 남기었다. 이들의 건물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습한 기후에서 썩어 없어졌다. 우리는 픽츠 문명이 스스로를 뭐라고 불렀는지도 모른다. 이것들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놀라운 보석과 조각들 그리고 세인트 베드와 같은 작가들의 몇 마디 논평 덕분에 그들의 문화에 대해 교육받은 추측만 하는 것이다. 픽트인들은 스코틀랜드 동부와 북부, 왕국 연합에서 살았다. 이들은 이들의 어머니를 통해 그들의 왕들의 통치권을 추적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한때 라틴어의 이름인 픽티로 알려진 청색 물감인 우드를 몸에 칠하지 않았었는데, 이들은 웨일스 사람이 된 것처럼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9세기 중반에는 이들의 언어, 법 그리고 관습들은 사라졌다.

 

이들은 게일스나 스코틀랜드의 왕인 케네스 맥 앨핀에 의해 전멸되었다고 말하는데, 그들의 후손들이 점차 스코틀랜드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학자 알렉스 울프는 케네스 맥 앨핀은 픽트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경우 픽트족은 물리적으로 파괴된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겔스족에게 점령당했을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픽츠의 수수께끼는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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